삶의 나침반
내 아들이 옆집 철수씨랑 결혼한다? 본문
아마 한국은 이런 문제가 아직까지는 심각하게 논의되어지지는 않겠지만, 이미
유럽이라든지 미국은 gay marriage (동성 결혼) 을 합법적인 것으로 인정해야 할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의견이 분분할
뿐더러, 유명 일간지 같은 곳의 커버스토리로 이미 여러 차례 다루어지고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3개주가 동성결혼을 합법화
시켰으며,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 때 함께 치루어진 투표로 캘리포니아에서는 동성결혼의 합법화 결정이 가까스로 위헌으로 결정되어,
동성애자들의 반발과 역소송을 맞고 있는 실정이다. 보수 기독교 및 다른 종교집단에서는 동성결혼의 합법화에 대해 핏대를 맞대고
싸우고 있다. 딱히 종교를 가지지 않은 일반 사람들도,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나~ 하면서 굳이 동성결혼에 대해 썩 꺼리껴
하지는 않는 분위기인 것만은 사실이다.
이런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한번쯤 자신의 견해를 분명히 해두는 것은 좋을 것 같다. 그러다보면, 자신이 가진
정신기본의 뿌리를 자각하게 될 뿐더러, 왜 사람들이 이렇게 요란스러운지 이유도 대강 파악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혹 자신의
생각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동조를 얻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신의 생각이 이렇다’라는 결론을 낸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을 것 같다.
그래서, 나도 용기를 내서 나는 이런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좀 정리를 해봐야겠다고 결심을 하게 되었다. 미래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지만, 10년 20년 후에 내 아들이 옆집에 사는 철수씨랑 결혼한다고 통보를 해 오면, 아버지로서 해줄 말은
있어야 할 것 같다.
일단 근본적인 요지로 들어가기 이전에, 언급해 두고 싶은 것이 있다. 동성결혼이 합법이냐 불법이냐의 요란 법석한 이
모든 소동의 일차적 원인은, 비교적 아주 쉬운데서 발생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결혼' 이라는 낱말에 있다. 만일 동성애를
느끼는 두 사람이 서로 함께 약속을 맺고 일생을 살아가기로 하는 일종의 엄숙한 약속절차를 굳이 '결혼'이란 낱말을 애초에 빌어다
쓰지 않았다면, 두 동성애자들이 함께 일생을 살기로 한 결심은 이토록 민감한 사회적인 이슈는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사실은
(나의 의견이다), '결혼'이란 낱말을 굳이 빌어다 쓸 이유는 없었고 써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누구도 지금껏 의문을
품지 않았듯이, 결혼이라는 것은 두 남녀(男女)가 서약하는 것으로 정의 되어 왔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질문을 던질
수도 있다. '왜 결혼이란 것이 굳이 성별이 다른 남녀가 해야 하는 거냐? 그것은 단지 하나의 전통(관습)이고, 전통이 바뀌어
소수의 사람들의 권리를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이라면, 전통이나 관습은 시대에 따라 바뀔 수 있다'라고 하는 반론적인 질문이다.
나는 이런 반론은 매우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런 반론을 통해, 우리는 결혼제도에 대해, 나의 배우자에 대해, 나의 부모님의
결혼생활에 대해, 우리의 가정에 대해, 내 이웃의 결혼에 대해 다시 한번 진지하게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가 분명히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반론은 정말로 동성애자들의 파트너쉽(partner-ship)을 옹호해 주기위해 항변하는 순수한
의도로 나온 것은 아니라고 생각 한다. 대신에, 이러한 급진적(?) 생각들은 현대사조를 지배하고 있는 하나의 정신인 것이다.
조금 더 생각의 연결고리를 만들어가기 전에, 먼저 분명히 집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그것은, ‘왜
동성애자들이 자기들의 파트너와의 삶을 결혼이란 제도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고 있냐?’는 것이다. 단지 동성애자들만 결혼제도로
인정받기를 바랬던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들의 이웃이나 친구들이 혹은 삼자들이 그들의 요구를 함께 관철시키기를 바래서 동조했기
때문에 이만큼의 사회적 이슈가 되지 않았나 싶다. 어찌되었든, 동성애자들이 자기 파트너와의 삶을 결혼으로 인정받아서 좋을 것이
있다면 여러 가지 사회적인 혜택을 들 수 있겠다. 부부이기 때문에 적용받는 세금면제, 사회적보장제도, 자녀 양육권 등등. 그런데,
사실은 이런 사회적인 혜택 때문이 아니라, 동성애자들의 합법적결혼 배경의 중요한 동기는 바로 ‘인정받음’ 이 아닌가 싶다.
주위의 가족으로부터, 친구로부터, 사회로부터, 나아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당당하게 인정받고 살고 싶어 하는 인간본연의 욕구를,
사회적제도의 힘으로, 실현하고 확인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나아가, 동성애자들을 사회가 이상한 사람들로 고립하지 않고 특수한 개성이
있는 소수집단으로 인정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만일 그들을 인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동성애자들의 합법적 결혼제도
승인‘이라는 사회적 제도라면, 석연치 않는 마음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대한 정의를 수정하여 그들의 승인요구에 동조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사회적 문제는 그 해결을 사람들이 엉뚱한데서 찾고 있다는 것이 문제인데,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때문이다.
첫째로 동성애자들의 합법적결혼승인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닌 이유는, 해결의 열쇠는 소수집단이 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바라보는 다수의 집단이 쥐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다수집단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요구를, 즉 결혼에 대한 일반적
정의를 바꾸어 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미 미국의 몇 개의 주에서 동성들의 결혼이 이미 합법화 되었고,
캘리포니아에서도 그것이 거의 합법화 될지도 모르는 분위기를 보면, 다수의 집단이 다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아마도 이런 합법적시도가 가능했던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회와 문화 속으로 맥을 따라 흐르는 하나의 거대한
현대사조가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고, 그 커다란 현대사조는 바로, 우리가 어떠한 삶의 가치(virtue)를 재조정하고 더
합리적으로 좋게 만들어갈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사조가 '맞다 혹은 그르다’의 문제는 뒤로하고라도, 결혼에 대한
관습적 (혹은 종교적) 정의를 재수정하는 큰 부담을 안고라도 동성애자들의 인권을 위해 새로운 관습적인 가치를 만들어간다는
진보주의자들은 (보수주의자들도 마찬가지이지만) 큰 모순에 빠져 있다. 그 모순은 바로 사회적 문제의 해결을 엉뚱한데서 찾고 있다는
두 번째의 이유가 된다. 진보주의자들이나 보수주의자들이나 (혹은 당신이나 나나), 결혼이라는 관습 속에 내재하고 있는 가치의
재조정을 통해, 동성애 소수집단을 바라보는 새로운 사회적 가치를 창줄해보려고 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러한 모든 시도는,
동성애소수집단을 바라보았던 다수집단의 가치체계가 그동안 얼마나 삐뚤어지고 왜곡되어 있었는지를 자명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인정해야 하는 것은, 다수의 사람들은 동성애자들의 소수집단을 철저히 외면해 왔다는 것이다. 소수집단에 대한 다수집단의
철저한 냉담과 무관심 그리고 고립에 대한 반작용이, 현대인들의 포스트모더니즘적인 현대사조에 도움을 얻어 제도적인 이슈로 들어나고
있는 것이다. 결혼제도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이전에, 동성애자들을 바라보는 비뚤어진 시각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해보는 것인
급선무이다.
앞서 이미 언급한대로, 만일 동성애 파트너들이 서로 의지하여 일생을 살기로 한 서약을 굳이 ‘결혼’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는 것이고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것이였다면, 다른 제도적 방법을 모색해 볼 수 있다. 굳이 ‘결혼’이라는 낱말보다는
그들의 파트너적 삶을 지칭하고 제도적으로 보호해 줄 수 있는 새로운 단어 (예를 들어, 파트너쉽)를 만들어 지칭하면 된다.
그런데도 일반적 ‘결혼’이라는 제도 속으로 그들의 파트너쉽을 동일화하는 것만이 그들의 인권을 보호해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정말로
유일한 방법이라면, 나는 나의 꺼리김을 숨기고 그들의 요구대로 양보(?)해 줄 수 있다. 그러나 이미 그 전에 우리는 할 일이
있다. 그것은 사람들을 자기의 모양대로 인정해주는 참 가치를 되찾는 것이다. 이것이 철저히 고립되었던 사마리아인들과 세리들,
그리고 창녀들을 찾아 인정해 주었던 성경을 통해 드러난 예수의 가르침이었고, 마음 속으로 오가는 참다운 인정만이 모든 것이 있어야
할 제자리로 모든 사람을 인도해 준다. 내 아들이 혹시 동성애자로 판명이 나더라도, 가족 안에서 정말로 인정해 주고 (분리시키지
않고) 여전히 사랑해 준다면, 내 아들이 커서 옆집 철수씨랑 함께 살고 싶어 할지언정, 철수씨를 데려와서 아버지 어머니처럼
결혼하고 싶다고 하지 않았으면 하는게 나의 희망이다.
--후기 ---------------------------------
이 글에 드러난 것처럼, 나는 동성 결혼은 바른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정상적인 것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런 이유에 대해서는 이 글에서 피력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는 이유들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닐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이렇게 동성결혼 문제가 사회적으로 대두된 것은, 다수집단들이 소수집단들을 바라보았던 역할의 책임도
크다고 생각한다. 사랑한다고 해서 벌을 줄수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어떤 것이 바른 것이 아니라고 해서, 그들을 무시하거나
그들의 요구를 무시해 버려서는 안된다. 이런 사회적 이슈를 통해, 소수집단들의 인권및 사회적보호들에 대해 다시한번 민감하게
통찰해야 하고, 그 민감성을 내 생활에 스며들도록 노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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