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나침반
언어의 장벽 본문
'언어'는 인간의 종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게 해 주는 큰 특징이다.
언어는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역할로만 흔히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언어없이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라는 말이 있다. 인식이나 사고는 언어가 기본적인 틀을 만들어주기때문에 가능할 것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간이 특정한 방식으로 하는 인식/사고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기초가 있어야 하며, 그 기초는 인식의 경계에서 벗어나 있는 무의식적이고 선험적인 무엇일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가 그런 기초의 한 부분이란 견해는 철학사로도 이어져 온다 [1]. 철학을 하는 사고는 언어로 이루어질 것이며, 그래서 언어의 구조를 먼저 이해하는 것이, 선험적인 인식의 기초를 들여다 볼수 있도록 만들어 줄 것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런 생각이 극단으로 가면,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말이 인간 존재의 확실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아니라, 단지 언어의 환상이라고 한다. "생각한다"라는 동사는 주어가 있어야 하는 문장이므로 주어가 동사와 함께 쓰여짐으로 인해서 (예를 들어 "내가" + 생각한다), 그 주어가 마치 당연히 생각하는 주체로 느껴진다는 것이다. 뭔가 그럴듯한 주장인 것 같다가도, 말장난처럼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다. 이런 견해를 심각하게 받아들일지 아니면 말장난으로 받아들일지는 자신이 세상을 보는 관점을 어디에다가 두고 있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것 같다. 인간의 절대적 주체를 인정하는 기반 (실존주의)에 두는지, 아니면 세상의 구조와 관계안에서만 인간의 주체를 논할 수 있다에 기반 (구조주의)을 두는지에 따라, 같은 해석을 보고도 따라오는 결론적 생각이 달라질 수 있겠다.
여하튼, 언어가 환상을 일으켜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존재하는 것처럼 인식하게끔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언어가 생각의 제약하거나 인식에 영향을 주는 것은 부정할 수는 없다. 자연현상을 기술하는 단어의 발달로 인해 자연을 더 깊게 인식할 수 있거나, 생리적인 현상을 더 다양하게 느끼거나 한다는 것은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쉽게 예를 들면, 문자나 기호도 언어의 범주라면, 자연법칙에 대한 수학적기술이 대단히 발전한 곳에서 과학문명이 찬란히 발전할 수 있었음을 안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언어의 변화나 발달로 인해, 우리가 사고하고 인식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바뀔 수도 있다는 점이다.
동물들은 생각을 할까?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 것은 분명하고, 감정을 나누는 것도 분명해 보이고, 간단한 퍼즐 같은 것을 해결해 내는 동물도 있다. 언어가 없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언어가 반드시 인지나 사고에 선험적 기초가 될 필요는 없지 지 않을까? 물론 우리가 '인지'나 '사고'를 어떻게 어디까지 정의하는냐에 따라 언어영역과의 필수불가결한 관계를 정립해 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점에서, 뇌과학이 언어와 사고의 관계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2]. 이것에 가장 큰 기여을 한 기술은, 뇌의 활동영역 (주로 뇌혈관의 피/산소의 흐름)을 실시간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술의 발달이었다. 그리고, 뇌에 심각한 부상을 가진 환자들의 일상경험을 관찰한 노력때문이었다. 어떤 환자들은 절대적으로 언어를 구사할 수 없고 언어를 이해할 수 없는 심각한 뇌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에게 어떠한 것을 지시할때는, 언어로 지시할 수 없고, 비언어적인 방법을 통해서만 지시가 가능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지적 능력을 통해 문제해결에는 큰 문제가 없다는 것을 관찰했다. 또한 뇌활동영역중에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과 인지적/사고 능력을 담당하는 부분이 뇌의 다른 부분에 위치한다는 것도 관찰했는데, 인지적능력을 수행하고 있을때, 언어를 담당하는 부분의 뇌영역은 전혀 활동을 보이지 않는 것을 관찰했다. 이러한 관찰로 인해, 뇌과학자들이 낼 수 있는 결론은 "언어없이도 사고할 수 있다" 라는 쪽이었는데, 이런 식이라면, "언어없는 동물도 사고을 하고 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사고'라는 복잡한 과정이 마치 무게를 재듯이 측정될 수 있는 물질계안으로 갇혀있는 느낌을 받는다.
아직은 뇌과학자들이 내려고 하는 결론은 너무 성급한 느낌이 있다. 첫째로, 철학자들이 말하는 '언어'와 자연과학자들이 탐구하는 '언어'는 같은 대상을 지칭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둘째로, 인식과 사고의 능력은 사람이 태어나 성장하는 오랜시간동안 언어적 그리고 비언어적 행위에 의해 부단히 개발되어지는 부분에 속한다. 따라서 이미 어른으로 성장한 사람의 뇌안에서 언어적 행위로 인해 활성화되는 영역은, 언어로 인해 이미 개발된 인식/사고의 해위가 활성화 시키는 영역과는 다를 수 있다. 셋째로, 사고나 인식이라는 것도 너무 다양한 종류와 깊이가 있기 때문에, 그 다양한 과정이 뇌의 한 부분의 영역에서만 주로 일어난다고 해서, 다른 부분과의 연결이 전혀없이 이루어진다고 보기는 매우 힘들다. 어쨌던간에 관찰을 통해 어떠한 결론을 내고 싶은지는, 그 과학자의 마음에 달려있거나, 사회의 조류가 이끄는 방식으로 유도되어 결론지어질 것이다.
나는 인간의 '사고영역'이 이런 식의 하나의 뇌혈류의 측정가능한 단위로 다루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인간의 사고는 고유한 인간의 존엄과도 연결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담당하는 뇌의 한 영역이 없어진다면, 그 사람은 더 이상 가치를 논할 수 없는 생명체인가? 뇌가 없는 아이는 동물로 취급해도 되는 것인가? 환원주의적인 접근으로 본다면 인간의 고귀한 가치와 고귀한 사상들은 뇌세포 뉴런들의 작용 그 이상은 아닌가? 모든 것들이 뉴런의 작용으로 이루어진다고 해도, 그 이상의 것이 있다고 믿을 수 있는 것은, 마치 어쩌면 양자역학적 관점을 가지는 것과도 비슷하다. 양자역학적 관점에서는 전자가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전자의 스핀방향이 동시에 윗쪽이기도 하고 아랫쪽이기도 하다. 물질이 어떻게 동시에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할 수 있을지 이해를 할 수 없지만, 인간의 존엄과 우리가 지키려고 하는 가치는 뇌속에만 일어나는 작용때문이기도 하고, 뇌가 없어도 여전히 존재할 수도 있다고 믿어보는 것도 그런 양자역학적관점 선상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너무 억측일까? 내 자신에게 끊임없이 물어보는 수밖에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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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훔볼트(Friedrich Wilhelm Christian Carl Ferdinand von Humboldt, 독일철학자 1767~1835) 는 언어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구조를 제약하며 세계를 파악하는 관점을 내장한다고 주장했다. 소쉬르 (Ferdinand de Saussure), 비트켄슈타인 같은 철학자들이 언어와 인식의 관계에 대해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다.
[2] 페도레코 (Evelina Fedorenko)의 연구: https://www.scientificamerican.com/article/you-dont-need-words-to-think/
You Don’t Need Words to Think
Brain studies show that language is not essential for the cognitive processes that underlie thought
www.scientificameric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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