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나침반
파이 (π) 의 상상 본문
"로직 (logic) 의 파괴는 창조의 세계를 열리게 한다."
동그란 원의 둘레길이는 원의 지름길이보다 3배보다 크고 4배보다는 작다. 정확한 비례관계는 파이 (π) 라고 불리는 상수로 나타내어지고 그 값은 약 3.14이다. 그러나 더 정확한 파이의 값은 3.1415926535897932384.... 이렇게 끝없이 이어지는 무한한 실수의 값이라고 한다. 이 값을 현재의 빠른 컴퓨터로 소수점 아래 22조자리까지 계산했지만, 무한개의 숫자에 비하면 22조개의 숫자는 아무것도 아니다. 이렇게까지 정확하게 파이값을 계산해 낸다는 것도 신기한 일이지만, 사실 이보다 더 곤혹스러운 일은 어떻게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율이 무한한 숫자로 남게 되는지에 대한 것이다. 원은 분명히 평면상 실제하는 도형이고 둘레길이도 잴수 있고, 지름도 잴수 있는 실제이다. 그렇다면 그 길이들의 비율은 분명히 딱 정해져 있을텐데, 그것을 숫자로 나타내려고 하면 무한한 숫자가 된다는 것은 어떤 오류에 빠져든 기분이 들면서도 어쩌면 존재론적 철학의 경지로 인도하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나는 처음에는 이러한 오류로 빠지는 원인이 "십진법"에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파이값의 무한실수는 십진법을 이용하여 나타내려고 하는 한, 무한의 오류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원의 둘레와 지름의 비율은 파이 상수이다.' 라고 정의하고, 그것을 굳이 숫자로 나타내려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오류에 빠질 일은 없었을 것이다. 실제로 고대의 수학자들은 어떤 비율의 값을 숫자로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 그냥 그만큼이다 라고 표기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의 둘레가 지름보다 정확히 얼마나 긴지를, 지름을 기준으로 측정하려고 하는 것은 어쩌면 이성의 본능일 수 있다. 둘레는 지름보다 세배이상 길지만 네배보다다는 작다. 더 정확히 알고 싶다면 지름의 길이를 열칸으로 나누었을때, 둘레는 지름의 세배와 한칸 (3.1) 보다 길고 세배와 두칸 (3.2) 보다는 짧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하다보면 다시 둘레와 지름의 비율인 파이가 무한숫자로 빠지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우리을 혼돈에 빠뜨리게 하는 다른 숫자의 개념들이 있다. 고대 철학자중에 제논이란 사람이 주장한 이야기 (제논의 역설) 가 있다. 사람과 거북이가 경주를 하는데, 경주에서 느린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사람보다 앞서서 출발하기만 하면, 빠른 주자인 사람이 결코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북이가 출발한 지점에 도착했을 때에는 그동안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 사람이 거북이가 조금이라도 앞으로 이동한 지점에 다시 도달했을 때, 그 시간동안 거북은 또다시 거기서 조금이라도 더 앞으로 이동했을 것이다. 이렇게 계속 가다보면 결코 사람이 거북이를 따라잡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마치 다음의 역설과도 일맥상통한다. 길이가 1 인 선분이 있다. 이것을 정확히 삼등분하면, 분명히 삼등분되어진 지점이 그 선분안에 존재해야 한다. 그러나, 그 지점을 숫자로 나타내면 1/3 이고, 이것은 0.3333333 ... 이렇게 무한이 이어지는 숫자가 되어버려서 그 삼등분의 지점 실제로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 혼동에 빠지게 되고 만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혼동을 주는 이유는, 우리가 막연히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한 가정에 뭔가 착오가 있기 때문이다. 그 가정은 바로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이다.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이 있을거라 막연히 가정하고, 이 가정을 바탕으로 추론을 해나가다가 모순이 생기는 결과를 얻었다. 위의 예에서, 사람은 분명히 거북이를 지나 먼저 도착점에 도착할 것이며, 선분을 삼등분한 지점은 공간상에 어딘가 분명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숫자로 생각하면 혼동스러워지는 결과를 가져온다. 왜냐하면 숫자로 나타내어지는 것은 시공간의 연속성의 가정 위에 세워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과 공간이 연속적이라는 가정이 틀렸음에 분명하다. 실제로 원자레벨로 들어가다보면 선분은 끊어져 있는 원자들의 집합으로 들어날 것이고, 상대성이론과 양자역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시공간이 우리가 상상하는대로 연속적이라는 보장도 없다. 즉 시간과 공간은 불연속적으로 존재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자각하는 것은, 위에서 이야기한 역설적인 이야기들이 왜 혼동을 주었는지에 대한 이해를 돕는 유익을 주기는 하지만, 이 세상에 대한 (시간과 공간에 대한) 막연한 이해의 기반을 흔들게 만드는 새로운 혼동을 준다.
다시 말해서 선분을 삼등분한 지점인 0.333 .. 같은 무한실수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이런 실수가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왜 우리는 이런 수들을 배우고 머리 속에서는 존재하도록 요구받고 있을까? 왜냐하면 수학은 특히 미적분학 (calculus) 는 이러한 실수들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미적분학은 시공간의 연속성의 가정 기반위에 세워졌다. 미적분학세계에서는 어떠한 길이나 시간을 무한히 많은 수의 무한히 많은 토막들로 쪼갤 수 있는, 무한의 원리를 사용한다. 이러한 가정이 없다면 우리는 극한값을 계산할 수 없고 미적분학은 제대로 된 해답을 주지 않는다. 실수는 존재하지 않지만 (실수는 실제의 근사일뿐이다), 실수의 가정위에 세워진 수학기법이 주는 해답들은 여전히 현실에서 쓸모가 있다. 그 해답들은 현실에서 충분한 근사치를 주기 때문이다. 미적분학을 이용한 많은 공학적인 응용 (물체의 시공간 측정, 우주선의 궤도 측정, 화학적반응속도계산), 물리학적인 응용 (파동방정식 등등) 들은 우리의 삶에 많은 혜택을 주고도 남는다.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을 극한, 무한, 실수의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수학적인 기술과 모형은, 물리학적으로 존재하는 세상에 많은 혜택을 실제로 준다는 개념은 매우 역설적이며 매우 흥미롭다 (미적분학의 역사와 그 영향력에 대한 더 자세한 이야기는 밑의 참고한 도서에서 얻을 수 있다)
물리학적으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존재함을 가정해야함으로써 실제로 영향을 주는 것은 미적분학의 세계만은 아닐 것이다. 이러한 역설적 개념은 종교인들의 신앙 (믿음) 에도 들어있다. 현대 과학문명의 혜택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영혼 (sprit)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여긴다.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도 없고 인간의 감각으로 느낄 수 없기 때문에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영혼이 영적인 세계가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가정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종교인들이 (예를 들면 크리스챤들) 그렇다. 크리스챤들이 영적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하는 믿음은 그들의 실제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주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다.
종교적믿음을 가지고 탐욕, 명예, 심리적 평안만을 추구하는 이기적인 종교인들을 옹호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그러나 과학문명주의를 사는 현대인들은 어쩌면 종교적믿음을 너무 홀대하고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과학적이고 이성적인 현대인들조차 어쩌면 이중잣대를 가지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실수는 마음껏 상상하고, 이러한 상상의 기반위에 세워진 물리적 혜택을 주는 수학적기법들은 옹호하면서, 영적인 세계를 상상하며 믿고 있는 사람들의 인생이 부조리하다고 치부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가 당연히 여기고 있었던 가정들이 무엇이었고 자신에게 어떠한 힘과 의미를 주고 있었는지 잠시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을 것 같다. 그 가정들이 순전히 상상이었다고 해도 존재론적 의미를 상실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리적현상을 당당히 규명하지만 상상의 숫자언어로 쓰여지는 수학이 여전히 의미가 있는것 처럼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이성적 논리 (로직) 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창조의 세계가 열리고 어쩌면 우리의 상상 (믿음) 이 현실이었음을 자각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그러길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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